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제가 더러는 오해를 받고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 흘리게 되더라도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가는 인내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제게 맡겨진 시간의 옷감들을
자투리까지도 아껴쓰는 알뜰한 재단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할 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슬기를 주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 밖에는 없는 것 처럼
투신하는 아름다운 열정이 제 안에 항상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제가 다른 이에 대한 말을 할 때는
"사랑의 거울" 앞에 저를 다시 비추어 보게 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남과 비교하느라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오늘을 묶어 두지 않게 하소서
몹시 바쁜 때일수록 잠깐이라도 비켜서서 하늘을 보게 하시고
고독의 층계를 높이 올라 해면이 더욱 자유롭고 풍요로운 흰옷의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극히 조그만 것이라도 다 기억하되
제가 남에게 베푼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건망증을 허락하소서...
- 이해인 수녀님
기도할 때 내 마음은
1
기도할 때 내 마음은 바다로 갑니다
파도에 씻긴 흰 모래밭의조개껍질처럼 닳고 닳았어도
늘 새롭기만 한 감사와 찬미의 말을한꺼번에 쏟아 놓으면
저 수평선 끝에서 빙그레 웃으시는 나의 하느님
2
기도할 때 내마음은 하늘이 됩니다
슬픔과 뉘우침의 말들은 비가 되고
기쁨과 사랑의 말들은 흰 눈으로 쌓입니다
때로는 번개와 우박으로 잠깐 지나가는 두려움
때로는 구름이나 노을로 잠깐 스쳐가는 환희로
조용히 빛나는 내 기도의 하늘
이 하늘 위에 뜨는 해.달.별, 믿음.소망.사랑
3
기도할 때 내 마음은 숲으로 갑니다
소나무처럼 푸르게 대나무처럼
곱게 한 그루 정직한 나무로 내가 서는 숲
때로는 붉은 철쭉꽃의 뜨거운 언어를
때로는 하얀 도라지꽃의 청순한 언어를 치워 내며
한 송이 꽃으로 내가 서는 숲
사계절 내내 절망을 모를 내 기도의 숲에 서면
초록의 웃음 속에 항상 살아 계신 나의 하느님
- 이 해인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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